2009년 09월 18일
랜디가 마법사라는 점에서 리치가 갖고 있던 마법 두루마리-스크롤들은 아주 귀중한 자료였다. 마법사들은 자신이 쓸 수 있는 주문을 남에게 쉽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단순히 싫어서가 아니라 스크롤은 그만큼 비싼 물품이기도 했다. 누구나 다 갖고 있을 만큼 흔하다면 스크롤을 제작하는 비용을 대는 것도 힘들 것이다. 기본적으로 스크롤을 제작할 때 사용하는 펜은 가장 흔한 것으로는 코카트리스라는 생물의 깃털이 사용되었는데, 피부가 닿기만 해도 돌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무서운 생물이기 때문에 포획하는 것도 힘들 뿐더러 현혹 계열의 주문을 이용해 그들을 얌전하게 한 다음에 깃털을 뽑아내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이 컸고, 잉크 역시 보통의 생물이 아닌 바다 속에서 볼 수 있는 거대 오징어의 먹물이나 마력이 깃든 다른 신성한 생물의 체액을 이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될 부분이었다.
하지만 랜디가 가져온 스크롤들이 전부 다 마법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비밀의 언어로 감춰져 있어서 원래의 내용을 알 수 없거나 전혀 엉뚱한 내용으로 덮어놓기도 하는 게 일반적일 뿐더러, 위험한 경우에는 함정으로서 읽는 즉시 폭발이 일어나거나 다른 차원에서 온 생명체가 나타나 공격을 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랜디가 스크롤들을 해독하는 과정은 매우 위험하면서 섬세한 작업을 요구했다.
'당신들은 위험에 처해있으니 모두들 깨우시오' 랜디의 머리 속에 울린 것은 환청이 아니었다. 주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바로 눈치챌 수 있는 종류의 주문-메시지라는 형태의 텔레파시와 흡사한 주문이었다. 누군가가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랜디 입장에서는 누가 이런 주문을 자기에게 사용했는지 알 길도 없었고 그의 말을 무조건 신용할 이유도 없었다. 단지, 그가 기습을 할 생각이었다면, 우리가 모두 잠들어 있을 때 했을 것이고 동료들을 깨우는 자체가 큰 위험은 아닐 터였다. 그래서 그는 정체모를 송신인의 충고를 받아들여 다른 사람들을 흔들었다.
「누군가가 이미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군」부시시한 상태이긴 했어도, 제이시는 새로운 상황에 금새 민감해지곤 했다. 주의를 기울이거나 관찰하는 역할에 있어서는 제이시가 가장 적격인 인물이기도 했다. 오랜시간 활을 다뤄온 만치 그는 우거진 정글 속에서 뱀이 기어가거나 하는 등의 사소한 변화도 쉽게 놓치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집중력 또한 놀라워서 흔들리는 안장 위나 마차수레 위에서도 그는 균형을 놓치지 않았다. 실제로 고향에서 그는 꽤 유명했는데, 4회 연속 활쏘기 대회에서 우승할 만큼 출중한 실력을 지녔다.「문 밖에서의 기척은 전혀 없는 듯한데」「마법을 쓰는 자라면 문을 이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네」랜디의 말에 맞장구라도 치듯 갑자기 랜디가 있는 쪽의 벽에 사람의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누군가가 벽을 통과하는 주문을 사용해 이 방으로 건너온 것이다.
「정체를 밝혀라!」이미 무장은 다들 갖춰져 있었고, 델서스는 주문 사용자가 혹여나 허튼 수작을 하지 못하게 그의 뒤쪽으로 순식간에 다가가 단도를 겨누었다.「검을 거두시오. 싸울 요량이라면 당신들을 깨우지도 않았소. 하긴 당신들이 그 정도의 준비는 되어있어야 지금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벽을 통과한 친구는 젊지는 않았지만 검은 수염이 얼굴을 거진 덮고 있어서 정확한 이미지는 그려내기 어려웠다. 적어도 마법사의 복장만으로도 그가 보통의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마법사는 로브를 걸치지 않는다. 특히나 모험중에는 그러했다. 모든 적들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랜디 역시 흰색의 로브를 얻기 전에는 결코 로브와 비슷한 것은 걸치지 않았다. 그만큼 그가 지닌 로브는 대단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고, 모르긴 해도 이 정체불명의 사나이 또한 로브에 특수한 능력이 있거나, 자신의 신분을 과시해도 될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일 수도 있었다. 아마도 전자의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화살받이의 표적이 되는 건 즐거운 일은 아니고, 또 그걸 무시할 만큼 미련하지도 않을 것이다.
「자기 소개를 먼저 해야겠지. 본인은 프라우 칼락스 출신의 자베르 노커라고 하오」이름을 듣고 반응할 수 있었던 인물은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랜디 뿐이었다.「텔다크와 대적하던 그 마법사? 하긴 당신이 아니면 여기에 등장할 만한 다른 인물이 없겠군요」「아무래도 소문이 진실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는 법이지」랜디는 눈을 부릅떴다.「아직 우리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한 적이 없소만」「꼭 당신들의 입을 통해서만 확인할 필요는 없는 법이오. 그리고 아무리 조심해도 몇 가지 정보만으로도 소문은 생기기 마련이지. 적어도 텔다크의 영역에서 되돌아온 모험가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고」어떤 식으로 정보가 흘러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그들은 각자의 소개를 했고 자베르의 요청에 따라 그들은 지나간 사건의 경과를 간단하게 얘기해주었다. 단순히 자베르가 그들의 손에 너무 쉽게 텔다크가 죽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래서 그에게서 몇 가지 물건을 챙긴 거로군. 확실히 완벽하지는 않아도 몇 가지는 눈에 익은 것들이오. 예를 들면 저 하얀머리친구가 들고 있는 무기는 확실히 텔다크가 지니고 있던 물건이지」델서스의 무기는 자유자재로 무기의 형태가 바뀌는 것이었다. 전투용 도끼나 창, 불꽃이 일어나는 검 등등 변화무쌍한 무기였다. 다양한 무기를 다룰 줄 아는 델서스의 특성에도 딱 맞는 것이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텔다크는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오. 그의 생명력의 원천을 찾아 부수지 못한 이상 그는 당신들을 찾아올 겁니다」「분명 그렇겠죠. 적어도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물건의 출처를 마법적으로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
자베르는 그들이 가져온 스크롤 가운데 하나를 꺼내들었다.「흠...이것만큼은 좀 다른데」「어떤 점에서?」「아직 별다른 마법적인 것들이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는군요」랜디도 같이 확인해보니 정말로 그것만큼은 어떤 마법적인 것도 감지되지 않았다.「환상으로 감춘 것도 아니고, 게다가 이건 다른 지방의 언어로군」특이하게도 랜디와 마누엘만큼은 그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본인들의 고향의 언어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마누엘은 더욱 특별한 문장을 하나 확인할 수 있었다. 융스템 가문이 충성하는 시라스 왕의 문장이었던 것이다.「이리 줘보게!」마누엘은 그 내용을 샅샅이 흝어보기 시작했다. 내용에 따르면, 텔다크는 벨허스트와 몇몇 프라우의 거인족들을 포섭해서 시라스의 영지의 경계선을 공격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고향의 정세에 가장 밝은 마누엘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 잘 알았다. 오랜시간 북쪽의 고원지대는 프라우 칼락스와 시라스의 경계선이 되는 거대한 얼음산맥에 의해 차단되어 있었다. 벨허스트는 더 남쪽에 위치한 채 시라스와 전쟁 중이었고 이 지역은 벨허스트에 속한 곳이긴 해도 전쟁에 있어서는 후방이나 다름없던 지역이었다. 얼음산맥을 건너 시라스를 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방인인 마누엘 일행도 이 지역에서는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았고,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전쟁터 한 가운데를 지나 돌아가는 게 유일한 통로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얼음산맥의 거인족이 북쪽의 산맥을 건너 갑자기 기습공격을 한다면? 대부분의 전력이 남쪽으로 가 있는 시라스는 거의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하나하나 땅을 뺏기게 될 것이었다. 더군다나 거인족들은 하나하나가 거대한 발리스타나 캐터펄트나 다름없는 공성병기였다. 아무리 높은 성벽이 있어도 수성이 결코 유리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얼른 본국에 돌아가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마누엘의 결정에 제이시가 한 마디했다.「함정일 수도 있잖아. 아니면 이 정보가 틀린 것이거나」「그 진위 여부를 확인하려면 본국에 가는 게 순서겠지」「하지만 돌아가면 적어도 석 달은 걸린다고. 게다가 전쟁터도 지나가야해」텔다크가 벨허스트의 동맹자라는 점에서 이 문서의 내용은 거의 기정사실에 가까웠다.「요는, 텔다크가 우리를 계속 쫓아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고」
그들의 직면한 문제에 자베르가 난입해서 제안을 했다.「국가간의 정치 문제는 아무래도 좋지만, 결과적으로는 당신들을 돕는 것이 텔다크를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군. 내게 한 가지 방법이 있소. 결코 안전하거나 쉬운 방법은 아니지만」모두들 자베르의 입을 주시했다.
# by BloodyFox | 2009/09/18 16:12 | 티알피지,환상이야기 | 트랙백 | 덧글(0)